竹島問題の歴史

11.8.08

1951 August 3rd; Memorandum

History of San Francisco Peace Treaty: Part Eleven

There is an interesting document which was written on August 3rd 1951. It shows that USA hadn't found the islands called Dokdo and Parangdo yet after 2 weeks since they heard the names for the first time. Mr. Boggs in the document was perhaps Samuel Whittemore Boggs (1889-1954) who was a geographer and who once wrote a letter to keep Liancourt Rocks to be Korean territory in July 1951. But even Mr. Boggs couldn't find Dokdo and Parangdo at all.




Office Memorandum UNITED STATES GOVERNMENT


DATE: August 3, 1951

TO: S-Mr. Allison

FROM: Mr. Fearey

SUBJECT: Islands


In his attached memorandum, Mr. Boggs states that although he has
"tried all resources in Washington" he has been unable to identify
Dokdo and Parangdo, mentioned in the Korean Embassy's note. On re-ceiving
Boggs's memo. I asked the Korean desk to find out whether anyone in the Korean
Embassy officer had told him they believed Dokdo was near Ullengdo, or Takeshima
Rock, and suspected that Parangdo was too. Apparently that is all Korean short
of a cable to Muccio.



As regards the French desire to change "Spratly Island" to the "Spratly Islands", Boggs now says that the plural is probably better though he has always previously supported the singular. Spratly is definitely a group of islands, not just one island.


93 comments:

  1. Pacifist,

    The document is not only evidence that the Americans could not find Dokdo or Parango, but also that the Korean embassy did not know where they were. Even Korea's ambassador was not sure where they were when Ambassador John Dulles asked him on July 19, 1951.

    "Mr. Dulles then inquired as to the location of the two islands, Dokdo and Parangdo. Mr. Han stated that these were two two small islands lying in the Sea of Japan, he believed in the general vicinity of Ulleungdo."

    On reason they did not know where the islands were was that they were not on any Korean maps, or any country's maps. Parangdo did not exist, and Dokdo was just the name fisherman on Ulleungdo used to refer to the Japanese island of Takeshima (Liancourt Rocks).

    Don't you think Koreans would have known the location of Dokdo if it had really been the "Seokdo" (石島) mentioned in the 1900 edict that made Ulleungdo a county of Gangwon Province?

    And you should cannot forget the September 16, 1948 letter from Korea's "Patriotic Old Men's Asssociation," which claimed that the name "Docksum" (Dokdo) came from the fact that the island was shaped like a Korean bowl. Moreover, the letter seemed to be saying that Takeshima, Liancourt Rocks, and Dokdo were all names for the island "Ulleungdo."

    The so-called Takeshima is the very "Docksum (sic) in Korean name, "and this is namely, Liancourt Rocks on the world's chart. This name "Liancourt Rocks" was established due to the name of French whaler which found out the island. Thereafter, by the Russian Warship "Palleada" in 1854 and by the English warship "Hornet" in 1855, the said island was re-found and the ship's name was given to it. But it was never suspected that variously named island was the very island of "Ulleungdo."

    All of this tells us that Koreans did not know a damn thing about Liancourt Rocks (Dokdo) when they were trying to claim them in the 1940s and 1950s.

    Also, you might want to reference THIS 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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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Gerry,

    Thnaks a lot for your profound comment.
    In the end, they came to know what Dokdo was and Korea's wish was rejected (Rusk's le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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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Anonymous11/8/08 08:52

    Dear Gerry Bevers,

    한국에서 상당한 자료를 모으고, 많은 활동을 하시는 것 같군요.

    문서를 통해서 자료를 분석하는 것 이외에, 을릉로를 직접 방문해서 오랫동안 거주한 주민과 직접 이야기 해보시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을릉도와 독도에 대해서 한층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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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Pacifist,

    There is nothing profound about my comment. The documents simply show that Koreans were making territorial claims based on rumors, historical exaggeration, and myth. Koreans even claimed that Tsushima was a Korean island.

    I get the feeling that the Koreans just expected the US to accept their claims without investigation and seemed to have been unprepared when the US started asking them for evidence of their claims.

    For example, Rhee Syngman dropped his claim on Tsushima when the US indicated it would send a US team to Tsushima to investigate Korea's claims on the island. Korea also dropped her claim on Parangdo when it was learned that the island did not exist. And when Korea could produce no maps or documents to support her claim on Liancourt Rocks, the US told Korea that the rocks would remain as Japanese territory, which prompted Rhee to unilaterally claim the islets when he declared his "Peace Line" just months before the 1952 peace treaty was to be signed.

    Despite all the Korean propaganda that claims Korea has administered Dokdo since the 6th century, the evidence shows that it was only in the late 1940s that Korea started claiming Dokdo. Rhee Syngman seemed to have decided that he liked the temporary line that MacArthur drew between Japan and Korea to better administer the surrender of Japan and wanted to keep it. That was when Korea started inventing a 1500-year history for Dokdo, a history that had no maps or documents to support it. In fact, there is no evidence that Koreans ever traveled to Dokdo before Japanese fisherman started taking them there on Japanese fishing boats in the early 1900s.

    Rhee Syngman began the lie in the late 1940s, and Koreans today continue to support it either out of ignorance or for fear of losing face.

    I think it would be better for Korea to admit the lie now and negotiate something with Japan rather than to continue to lie in the face of all the evidence that has been made public to the world through the Internet. However, before Korea can stop lying to the world, it must first stop lying to its own 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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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Anonymous11/8/08 09:15

    Gerry,

    한국은 1945년까지 일본의 식민지에 있었습니다. 1950년에는 한국전쟁이 있었습니다.

    일본 식민지 기간에는 많은 한국 문서가 불태워졌습니다. 일본은 이 기간에 식민주 수탈을 위해서 많은 준비를 했습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과 같은 비밀 문서가 더 존재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6.25 전쟁 기간에도 많은 문서가 소실되었습니다.

    Gerry, 편협한 주장을 계속 하지 마시고, 한국을 떠나 일본에서 정착하기를 바랍니다. 그토록 싫어하는 한국인데, 왜 한국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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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Anonymous11/8/08 09:28

    Gerry,

    일본식민지 기간에 한국은 아래의 link와 같은 일을 당했습니다. 그 기간에 독도에 대한 자료 뿐만 아니라 많은 문서들이 불태워 없어졌습니다. 일본은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한국 국민을 어리석게 만드는 정책(우민화정책)을 취했습니다.

    아래의 링크는 독도 문제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결국 독도 문제를 일으킨 역사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http://hanmaum.web-bi.net/zbxe/freeboard/494

    Gerry, 한국은 당신이 있을 곳이 아닙니다. 일본으로 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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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Lord,

    제가 한국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고 독도에 대한 한국의 거짓된 주장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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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Anonymous11/8/08 09:44

    Gerry,

    일본은 한국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한국의 역사에 관련된 많은 문서를 불태웠습니다.

    식민지 기간에는, 한국을 미개한 민족으로 묘사하는 사진을 찍어서 전세계에 배포했습니다. 이 기록은 한국의 방송에서 다큐멘터리로 방영했습니다.

    과거의 역사까지 가짜로 조작한 일본입니다. 당신은 진실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Gerry, 당신은 한국에 대해서 더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편협한 생각은, 당신이 한국에 있을 자격을 박탈하고 있습니다.

    을릉도에 직접 가셔서, 독도를 눈으로 확인해 보고, 을릉도 노인분들과 많은 대화를 해 볼 것을 권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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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My sweet lord,

    Gerry는 한국을 아주 좋아합니다.나도 좋아합니다.Gerry도 나도 그 좋아하는 한국이 독도에 대해서는 이상한 교육을 하고 있으므로 그것을 시정하고 싶다고 하는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우민화 정책」은 정말로 있었다고 생각합니까?한반도 전체에 교육기관을 1000이상이나 만든 것은 누구입니까?한글을 사용한 교육을 시작한 것은 누구입니까?

    한국에서는 전쟁 전에 관한 정보, 이씨 조선의 시대의 올바른 정보가 교육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독도에 대해서도 같습니다.이승만 정권이 일본의 어민을 죽이거나 나포하거나 해 큰 문제가 된 것을 한국에서는 가르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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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Gerry,

    Thank you for your comment, I totally agree with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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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Anonymous11/8/08 10:26

    Dear Pacifist and Gerry,

    한국 국민은 일제 식민지 기간에, 일본어를 강제로 사용해야 했습니다. 아직도 아주 나이 많은 노인분들은 일본어를 할 줄 알고 있습니다.

    그 당시 한글과 한국어를 사용하면, 형무소에 잡혀갔습니다.

    그리고, 많은 한글 자료와 한국의 역사적 문헌들이 불태워졌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많은 자료들은, 죽움을 각오하고 일본인 몰래 숨겨서 보관하고 있던 것들입니다.

    진심으로 한국을 사랑한다면, 한국의 아픈 과거에 대해서도 공부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래의 link에 있는 사진들은 일제 식민지 기간에 자행된 끔찍한 사건들입니다.

    식민지를 미화하시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그건 한국에 대한 굉장히 심한 모욕입니다. 조선은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는 등 평온하고 지식을 갖춘 나라였습니다.

    일본의 집착이 조선을 망가트렸습니다. 그렇게 해놓고서, 교육을 했다고 하는 것은 억지 주장입니다.

    http://hanmaum.web-bi.net/zbxe/freeboard/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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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dear lord,

    한국에서는 이것은 배우고 있지 않다(의도적으로 숨기고 있어?)(이)라고 생각합니다만, 한글 교육을 시작한 것은 일본 통치 시대이고, 첫 한글 사전을 만들었던 것도 조선 총독부입니다.

    1938년, 한글은 필수 과목으로부터 떼어져 선택 과목이 되었습니다. 한국인이 교장의 학교에서는 한글 교육 자체를 폐지한 학교도 많이 있었습니다만, 일본인이 교장의 학교에서는 계속해 한글 교육이 계속되었습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1941년, 조선어의 의무 교육에 있어서의 수업은 폐지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비상사태였음에도 관련되지 않고, 제국대학에 대하고는 조선 문학의 강좌가 개강되어 조선어를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었습니다.

    일상생활에 관심을 가지면, 조선어의 라디오 방송은 종전시까지 계속되었고, 조선어의 영화도 상영되고 있었습니다.

    한글의 신문을 처음으로 보냈던 것도 일본인이었습니다.이 사이트를 봐 주세요.일본어는 읽을 수 없을 것입니다가, 스크롤·다운하고 사진을 봐 주세요.일본 통치하의 교과서나 그 외의 자료를 볼 수 있습니다.한글로 써 있는 것이 읽을 수 있습니까?한글의 수업의 사진도 있습니다.

    http://ameblo.jp/campanera/theme-1000285920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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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Anonymous11/8/08 13:07

    Dear Pacifist,

    정말 대단하시군요. 그토록 많은 자료를 준비해놓고 계시다니.

    일제 시대때에 한글 교육을 일부 허용한 것은 유화정책이었습니다. 그 이후에는 한글 교육을 폐지하고, 일본어 교육을 더 강화하였습니다.

    다음은 다른 사람의 의견입니다. 로그인을 해야 볼 수 있는 정보라서 link는 생략합니다.

    +++

    일본 제국주의는 한국을 강제 병탄(倂呑)한 후, 강력한 식민지 탄압정책을 채용하였다. 그리하여 이른바 ‘헌병경찰정치’라 하여 헌병경찰을 전국에 배치하여 한국의 민족운동을 탄압하고 통제를 강화하였다. 그러다가 3·1 독립운동이 발생한 후로는 정책에 문제가 있었음을 인식하고 유화정책을 폈다. 즉, 한국인의 문화생활이나 교육 등을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정책을 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모두가 식민통치의 한 수단일 뿐, 그들의 식민지 통제정책의 근본에는 변함이 없었다.

    1930년대에 들어와 일본 군국주의는 대륙침략을 본격화하면서 전쟁에 몰입하게 되었다. 1931년에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키고, 1937년 중일전쟁(中日戰爭)을 일으켰으며, 1941년에는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을 일으켜 미국의 하와이, 동남아시아 등을 공격하였다. 전쟁으로 국력의 소진을 들어내면서 그들은 식민지 통치에 새로운 마각을 들어냈다. 즉, 한국을 전쟁물자 보급창으로 사용하려고 하여 이른바 ‘병참기지화’정책을 펴나가면서, 이를 위해서 식민지를 아예 일본의 일부로 만들려는 무서운 ‘민족말살정책’을 수행해나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인이 한국인으로 있는 것보다는 한국인도 일본인과 똑같은 동일국민 내지는 동일민족의 처지로 개조할 필요가 있었다.

    식민통치 제2기에 해당하는 1919 ~ 1931년 사이에 일본과 한국, 만주를 융화하여 서로 가깝게 지내자는 의미로 내선융화(內鮮融和 일본과 조선이 융화해야 함), 선만일여(鮮滿一如 조선과 만주가 하나와 같음), 일시동인(日是同人 일본과 조선이 하나의 민족임) 등의 조금은 부드러운 강령을 내세웠다. 그러나 제3기에 이르러서는 그러한 정책을 좀 더 강화 확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1932년부터 《조선사(朝鮮史)》를 간행하였는데, 여기서 한국인과 일본인이 동일민족이라는 동조동근론(同祖同根論)을 주장하고 내선일체(內鮮一體 일본과 조선은 하나임)설을 내세웠다.

    그리하여 일본민족과 한민족은 시조신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적자과 서자로서 하나의 조상을 가진 같은 민족이라고 역사를 날조하였다. 그리하여 한국인을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하려고 하여, 일본 왕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였다. 전국에 신사(神社)를 세우고 한국인들로 하여금 매일 정오에 신사를 참배토록 하고, 거기서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를 선서하도록 하였다. 한편, 일본 왕이 있는 동쪽을 향하여 절을 하라고 강요하여 이른바 동방요배(東方遙拜)를 실시토록 하였다. 나아가 모든 가정집에는 카미타나(神棚)라고 하는 신이 들어있다는 상자를 만들어 모시고, 거기에 수시로 경배하도록 강요하였다. 이러한 일체의 행위는 한국인의 혼을 말살하고 일본인의 정신을 대신 심으려는 한국혼 말살정책이었다.

    다음으로는 제도적으로도 한국인의 모습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일본인으로 만들려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1937년부터 이른바 ‘창씨개명’이라 하여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만들어 등록하도록 강요하였다. 그리하여 보통 3자로 되어 있는 전통적인 한국인의 이름을 보통 4자인 일본식으로 개명토록 하였다. 만일 일본식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취학, 취업, 우편물 이용 등의 공공생활을 규제하거나 신체적 학대를 가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한국인 전통과제도의 말살이었다.

    다음은 언어 차원의 민족말살이다. 병탄이후 학교에서 한국인에게 일본어를 가르치더니 점차 강화하여 일본어 교과서를 사용하고, 한국어 교육을 폐지하고 일본어만을 가르쳤다. 그리하여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어린이들에게 평상시에도 일본어 사용을 강제하여, 어린이들에게 매 달 일정량의 표를 나누어 주고 한국어를 사용할 때마다 그 표를 서로 따먹도록 하여 경쟁시키고 상벌을 가하는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하였다. 일반인에게도 한글을 가르치는 야학, 하계활동 등을 통제하고 반대로 일본어 강습소를 전국에 설치하여 일본어를 가르쳤다. 민간인의 민원서류 등에도 모두 일본어를 사용토록 강제하였다. 또한 한글로 된 신문(동아일보, 조선일보), 잡지(신동아)를 폐간시키는 등 일본어 사용을 강요하였다. 이러한 정책에 한글학자 등은 문화적 저항운동을 하였다. 이에 일제는 한글학자들을 체포 투옥하여 이른바 ‘조선어학회사건’이 발생하였다(1942). 민족혼이 깃든 민족 언어 말살로 한국인을 말살하려고 하였다.

    일본은 한국 역사도 말살시키고자 하였다. 한국인은 역사적으로 분열적이고 의타적인 민족이며 나약하여 사대정신이 강한 민족이며, 외침을 많이 받은 열등민족이라고 비하하였다. 또한 옛날부터 일본의 지배를 받아온 한국은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은 당연하며 그래야 안전하다는 식의 왜곡된 역사의식을 심어주었다. 종국에는 한국사 교육을 폐지하고 본국사(일본사) 교육을 강요하였다. 이에 대하여 민족사학자들의 학술단체인 진단학회(震檀學會)는 식민사관을 극복하는 역사 연구를 꾸준히 해나갔다. 조선총독부는 이를 불순하게 여기고 해산토록 강요하여 결국 1942년에 해산되고 말았다.

    그 밖에 전쟁 수행을 위해 한국에서 인적·물적 자원을 착취하는 병참기지로 사용하였다. 인적자원 착취로는 징병, 징용, 동원 등을 들 수 있다. 태평양전쟁이 확대되자, 한국 청년들을 전쟁터로 몰아넣었다. 1943년에는 ‘학도지원병제도’를 제정하여 한국인 학생 4500여 명을 지원병 형식으로 전쟁터에 투입하였다. 1944년 전쟁이 어렵게 되자, 보다 강력한 징병제도를 실시하여 패전 때까지 20만여 명을 전쟁터에 내몰았다. 한편, 젊은이들을 전쟁을 지원하는 일터에 투입하였는데, 중일전쟁으로 전쟁이 확산되자 1939년에 ‘국민징용령’을 발하여 한국인 청장년들을 강제로 연행해갔다.

    태평양전쟁 이후에는 징용 영장에 의한 인력 모집이 제대로 되지 않자, 트럭을 몰고 다니며 거리나 일터에서 마구잡이로 사람을 잡아갔다. 그래서 아무도 몰래 잡혀가는 경우도 있고, 트럭에서 뛰어내려 도망가 목숨을 건지는 경우 등 비애가 많았다. 인력동원에는 성별 나이에 무관하게 마구잡이로 동원하여 일터로 내몰았다. 중학생은 물론 국민학생까지도 ‘근로보국’ ‘근로동원’이라는 이름으로 잡아가서 군사 시설 공사장으로 투입하였다. 그리고 심지어는 '여자정신대근무령(女子挺身隊勤務令)'을 공포하여 12 ~ 20세의 젊은 여성까지도 잡아가 군수공장에서 노역시키고 일부는 동남아시아 전쟁터로 투입하여 ‘군대위안부’라는 성노예로 학대하여 세계 역사에 유래없는 잔악한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전쟁물자로 사용하기 위해 각종 지하자원, 기름, 놋쇠그릇, 곡식 등을 약탈해갔다. 총알, 대포를 만들기 위해 가정용품인 놋쇠수저까지 약탈하고, 비행기용 온갖 기름 대체유류를 마구잡이로 수탈해갔다.

    그러나 민족정신을 잃지 않으려는 애국자 애국민족은 그들의 눈과 손을 피해 우리의 민족성을 보존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여 민족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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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All this document suggests is that the U.S. Geographer Boggs had no idea the Koreans referred to Liancourt Rocks as "Dokdo"

    In July of the same year Boggs had already recommended Japan renounce Liancourt Rocks and they be included as part of Korea. The American geographer thus concluded Liancourt Rocks and the surrounding area should be Korea's.

    Boggs-Says-Liancourt-Is-Korean

    To think the Korean's didn't know of Dokdo in the 1950 is probably one of the most retarded comments I've ever heard of on this forum and takes the quality of the posts here to a whole new level of stupid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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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Anonymous11/8/08 13:34

    Dear dokdo-takeshima.com,

    I really appreciate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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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dear lord,

    이씨 조선 시대의 일도 한국에서는 올바르게 교육되어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부패 정치에 의해서 적빈 상태인 것을 일본인의 세금으로 이것을 도운 것은 한국의 사람들은 배우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이씨 조선 시대의 참상을 전하는 책은 한국에서는 출판되지 않을 것입니다.일본의 책도 신용되지 않을까요들 , 구미에서 출판된 책을 읽으시는 것을 권합니다.

    Claude Charles Dallet:
    이 사람은 프랑스 사람이기 때문에 프랑스 말로 밖에 손에 들어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일본에서는 일본어로 번역한 것이 나와 있습니다)

    Isabella Bird:
    이 영국 부인이 쓴 책은 유명합니다.미국의 아마존으로부터 직접 살 수 있습니다.
    http://www.amazon.com/Korea-Her-Neighbours-Narrative-Vicissitudes/dp/1402144970/ref=pd_bbs_sr_6?ie=UTF8&s=books&qid=1218428957&sr=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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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Dokdo-Takeshima (Steve Barber),

    As usual, Steve, you make a silly claim and then post something completely irrelevant.

    What does Bogg's recommendation have to do with the fact that the Korean embassy did not seem to know where Dokdo was on August 3, 1951?

    And what does it have to do with the fact the Korean ambassador did not seem to know where Dokdo was on July 19, 1951? The Korean ambassador even claimed there was an imaginary island named "Parangdo" somewhere in the general vicinity of Ulleungdo?

    And what does it have to do with the fact that Korea's "Patriotic Old Men's Association" claimed that "Docksum" got its name from the fact that it was a "pot-shaped island"? Does Liancourt Rocks look pot-shaped to you?

    They just made up that story to try to give their claim more authority, not realizing that it showed their ignorance of the islets. The "Dok" (獨) in Dokdo means "solitary," not "pot," and there is no evidence that it had ever been referred to as a "pot-shaped island." Of course, maybe, they were confusing it with Ulleungdo's neighboring island of Jukdo (竹島), which is 2.2 kilometers off Ulleungdo's east shore and does look like an upturned pot?

    The truth is that Korea's claims on Dokdo were half-baked, and US officials obviously noticed that since they rejected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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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dear lord,

    「한글 교육을 일부 허용 한 것」이라고 하는 표현은 실수입니다.당시는 조선 총독부가 한글을 장려했습니다.일본인의 공무원도 한글을 배우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라디오도 신문도 영화도 한글이 사용되고 있었습니다.일본인이 한글을 빼앗은 것은 아닙니다.

    한국의 학교에서는 「일본인이 한글을 빼앗았다」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그러나, 그것은 한국 정부의 정책(반일 정책)에 의한 만들어낸 이야기입니다.믿어 주세요.확실히 일본 통치 시대에는 싫은 일본인도 있었겠지요.기분에 따르지 않는 것도 있었겠지요.그렇지만 많은 일본인은 한반도를 근대화 하는데 땀을 흘렸습니다.

    한반도의 사람들이 당시도, 그리고 지금도 먹고 있는 미는 일본의 농업 박사가 품종 개량 한 종류였던 일을 알고 있습니까?

    일본의 통치가 시작되고 나서, 한반도에서는 인구가 급증한 것을 알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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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Anonymous11/8/08 15:17

    Dear Pacifist,

    당신의 글 중에서 일부분을 인정합니다.

    조선의 흥선대원군은 쇄국 정책을 펼쳤습니다. 외부 문명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지요. 그로 인하여, 결국 조선은 일본에게 병합되고 말았습니다. 변해야 할 시기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일본의 자포니카 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일본의 농업 기술이라던가, 일본으로 부터 번역된 책을 들여온 것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주장의 일부분대로, 조선은 일본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면서 그렇게 변해야 했을까요?

    한국의 속담 중에, 병주고 약준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을 병들게 하고서, 치료해줬다고 하면, 누가 그것을 호의로 받아들이겠습니까?

    Pacifist, 당신의 논리는 일본의 일방적인 입장입니다. 한국의 독립을 위해서 순국한 무수히 많은 독립운동가들 앞에서도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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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Anonymous11/8/08 15:28

    Dear Pacifist,

    일본은 선진 문명을 빨리 받아들였습니다.

    1900년대(?)에 영어를 국어로 사용하려던 움직임이 있던 것도 알고 있습니다. 영어를 사용하게 되면, 빈부격차가 더 심해질 것을 걱정하여, 외국 서적을 번역하기로 결정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일본에는 번역책이 많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본의 빠른 움직임이 일본을 강하게 만들었지만, 주변국을 침략한 행위는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ReplyDelete
  21. Excellent post, Pacifist.

    Gerry
    I have a question.
    How does a Korean bowl look like?
    Does it look like Ulleungdo?

    ReplyDelete
  22. dear lord,

    진지하게 이야기해 받아 감사합니다.

    이씨 조선 시대의 말기에도 뛰어난 한국인이 있었습니다.조선을 근대화 해, 독립 시키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나는 이 사람들을 존경합니다만, 결국 보수파에 살해당해 버립니다.게다가 일본에 유학하거나 일본에서 배운 것만으로 「친일파」로서 지금도 올바르게 평가되고 있지 않습니다.

    이러한 수재들이 활약 되어 있으면, 그 후의 역사는 크게 변했겠지요.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는 않았습니다.왕조 말기에 정권은 부패해, 나라는 도괴 직전이었습니다.

    일본이 돕지 않았으면, 러시아나 청이 침입했겠지요.시베리아 철도를 시설 하고 부동항을 목표로 하고 있던 러시아가 진출한 가능성이 높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한반도는 지금의 러시아의 연해주의 일부가 되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일본에 있어서도 러시아가 반도까지 나오고는 안전상, 바람직하지 않았습니다.

    중국에서의 전쟁은 확실히 군부가 독주해, 「침략」이라고 해지는 것은 압니다만, 한반도에서는 사정이 다릅니다.특히 20 세기 초의 보호국화, 1910년부터의 병합은 서전 반도의 사정에 의하는 곳(중)이 컸습니다.

    한국에서는 청일 전쟁, 러일 전쟁도 일본의 침략의 일환이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다릅니다.

    서울에 있는 「독립문」은 언제 지어진 것 바구니 알고 있음입니까?그리고 그것은 어느 나라로부터의 독립이었는가, 알고 계십니까?
    독립문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영은문」이 있었던 것도 알고 계십니까?그리고 이 문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는가 알고 계십니까?

    나는 한일 병합이 올발랐다고 말할 생각은 없습니다.그러나, 그 배경에는 조선 국내의 사정이 있던 것을 이해해 주었으면 합니다.
    조선 국내의 독립파가 한일 합병을 희망했습니다.거기에 따라 보수파의 체질이 개선되는 것을 기대했겠지요.
    일본내에도 합병에 반대하는 정치가는 대부분 있었습니다.이토히로부미도 그 한 사람입니다.그러나 그는 안중근에 암살되어 버렸습니다.
    어떨까 역사를 중립의 입장에서 봐 주세요.일본에도 물론 나쁜 부분은 많이 있었겠지요.그러나, 그 뿐만 아니라, 조선 국내에도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21 세기입니다.과거의 역사를 넘고, 양국은 모두 걷고 갈 필요가 있습니다.으르렁거리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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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Ponta,

    A "dok" (독) is actually a "pot" rather than a bowl. Koreans use them to store kimchi, bean paste, and many other foods. The following picture shows Korean pots:

    Korean Pots (dok 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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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Anonymous11/8/08 18:04

    Dear Pacifist,

    영은문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조선에서 중국 사신을 맞을 때 사용하던 문이죠. 조선은 당파 싸움과 사대주의에 물들어 있었습니다.

    임진왜란을 사전에 막지 못한 이유도 당파 싸움에 있었죠. 40년을 수탈 당하고서도 그 이후에 또 다시 당파 싸움은 계속 되었죠.

    조선의 일부 정치인들은 나라보다 자신의 입지가 더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영은문을 허물고 그 자리에 세운 것이 독립문입니다. 조선의 역사에 대해서 저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계시는 것 같군요.

    그 당시에 일본이 아니었다면, 중국, 아니면 러시아의 식민지가 되었을지 모르는 일이겠죠.

    그 당시의 세계 변화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조선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는 것 같습니다.

    과거를 정리하고 새로운 미래를 맞이해야 하는데, 일본 우익의 움직임을 보면 다시 한국을 침략하려는 것 같군요. 다시 잘못된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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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dear lord,

    빠른 (답례)답장을 감사합니다.역사 중(안)에서 다양한 사정이 있었던 것이라고 하는 것, 일방적으로 모두 일본이 나쁜 것이라고 하는 생각이 아닌 것을 알아, 안심했습니다.

    양국은 불행한 역사를 제외하면 문화적으로는 극히 잘 닮은 나라입니다.향후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 토대는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덧붙여 씀:독도에 대한 증거, 부디 찾아 가르쳐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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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 http://www.dokdo-takeshima.com/SFUS.jpg
    "In a Japanese Foreign Office publication, entitled "Minor Islands Adjacent to Japan Proper", Part IV, June 1947, Liancourt Rocks are included."

    Japan has not yet released "Minor Islands Adjacent to Japan Proper" to the public. Only the part concerning northern territories(Etorofu, Kunashiri, Shikotan and Habomai) was discovered in Public Record Office of Australia. This Boggs memo shows that Japan has been claimed the sovereignty of Takeshima. And Bogg's grounds are only drafts in 1949 which is ineffective. It also shows that the drafts before 1949 ware groundless about Takesh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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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 The Japanese are really desparate. Here we have America's outright support of Korea's sovereignty and administration over Dokdo not even a month ago and still Japanese Takeshima lobbyist place more importance on 50 year old confidential memorandums. Seriously what a joke!

    The San Fransics Peace Treaty makes NO mention of Liancourt Rocks.

    Korea is in no way bound by the San Francisco Peace Treaty.

    American decisions on Dokdo Takeshima has absolutely nothing to do with true historical title to Dokdo, they were military decisions made by military men.

    American (military) support of Japan's title was just one nation's opinion. Without concent of the other 47 nations involved America could NOT make unilateral decisions regarding dispositions of former Japanese outlying islands.

    Pacifist, how many times do I have to shoot down your flimsy argument before you give up. Aren't you tired of looking foolish?

    Gerry, so what if the Koreans were claiming Tsushima? The Japanese were trying to grab Ulleungdo. What's your poi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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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Anonymous11/8/08 23:24

    안녕하세요.
    글을 잘 읽어보았습니다.
    굉장히 슬프군요...

    그 쪽에서 주장하실 때 A가 아닌B의 주장은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에 여기에 어떤 증거를 제시해도 당신의 생각은 바뀌지 않을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다릅니다. 다른 것이 진실이라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고 그것이 제가 받아온 교육입니다.

    당신은 반대로 독도가 한국의 것이라는 증거들은 찾아보았습니까? 코맨트를 쓴 사람들에게 찾아달라고 하기 전에 이런 주장을 하시려면 먼저 찾아 보시는게 낫지 않았을까요,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일본은 잘 사는 나라입니다. 우리는 그렇치 못합니다. 당신이 말하듯 일본의 영향때문이 한국이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냐고 하는 말은 일부 맞습니다.하지만 어떤 일이건 의도라는 것이 있지않습니까. 일본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우리에게 그렇게 행동했는지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그 의도라는 것이 한국 국민에게 끼친 영향은 아직까지도 짙게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과 같은 외국인이 문서적 증거를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다해도 죽을 때까지 알 수는 없는 것이겠지요. 전쟁 후 세대의 핏줄을 이어받아 그 슬픔을 어려서부터 잘 알고 있는 우리와는 당신은 다릅니다. ( 이 말은 한국의 핏줄을 강조하는 편협한 국수주의조는 아닙니다.)

    아무튼 당신의 포스트들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알고자 노력했다고 생각했고 저 또한 많은 것을 배우고 갑니다. 하지만 아무리 당신이 말을 해도 한국 사람들에게는 영향을 끼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국인을 이해한다면
    Dok-do or Takeshima 라는 식의
    "투표"따위는 하지 않을테니 말입니다.

    이 투표는 굉장히 슬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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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 Steve,

    Don't propagate your distorted theory here again. We are just showing the facts in chronological order.

    Even if you denounce the result, it was USA's decision and other countries including UK, Canada and Australia agreed the decision.

    This is a history, not your imaginary g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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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Boggs's diary

    July 13, 1951
    Takeshima should be a Korean territory. U.S. should have had reliable evidences. Because Takeshima was made a Korean territory in old drafts though Japan was insisting Takeshima's sovereignty. I will look for evidences.

    August 3, 1951
    I searched all resources in Washington for three weeks. However, there was no evidence which shows that dokdo is a Korean territory. Old drafts are random. I was disappointed at US govern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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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dokdo-takeshima.com,
    It is necessary to revise the treaty according to the formal procedure when there is a mistake in the treaty. Please read article 39, 40, 41 of Vienna Convention on the Law of Treaties. http://untreaty.un.org/ilc/texts/instruments/english/conventions/1_1_1969.pdf
    However, the treaty is not revised. Moreover, the agreement of Japan is necessary for the revision. Therefore, the SF treaty is still effective. Thank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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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 so....

    안녕하세요.당신의 의견을 봐 나도 슬픕니다.1910년의 일본의 의도와 1945년의 일본의 의도가 같다고 생각됩니까?한국의 교과서에서는 일본은 최초부터 침략의 의도로 한반도에 진출했다고 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큰 실수입니다.

    태평양전쟁의 무렵은 군부가 실권을 잡고 있었습니다.유감스럽지만 민간 정치가는 그들에게 맞겨룸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1894년의 청일 전쟁, 1904년의 러일 전쟁, 그리고 1910년의 한일 병합의 시대는 정치가가 일본의 정치를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한일 병합까지는 정치적 결단으로 행해진 정책이며, 군부의 영토 마토노심으로 움직인 것이 아닙니다.
    19 세기말에서 20 세기 초의 제국주의의 시대에는 일본의 안전을 위해서는 한반도의 안정이 필요 조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부패한 왕조는 청의 속국이 되어 독립의 기운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그 청은 영국과의 사이에 아편 전쟁을 일으켜 식민지화되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일본의 정치가들은 이것에 큰 위기감을 안았습니다.조선에도 일본과 같이 유신을 일으켜 독립국가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바랐습니다.

    청일 전쟁은 그 때문에(위해) 일어난 전쟁입니다.이 전쟁에 승리한 덕분으로 조선은 중국의 속국에서 없어졌습니다.조선의 독립은 일본의 정치가의 소망이었습니다.

    시모노세키조약의 제일조에 조선의 독립을 구가하고 있는 것은 기타째입니다.당시 조선 국내에서는 독립을 축하하는 퍼레이드를 하고 있습니다.
    일반 민중도 독립을 희망하고 있었습니다.그런데 보수 세력이 독립파를 탄압합니다.언제까지 지나도 독립국이 되지 못하고, 이윽고 러시아의 발소리가 들려 옵니다.
    시베리아 철도 건설을 급한 것, 부동항 목표로 해 남하해 오는 러시아는 만주와 한반도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작은 신흥국 일본이 대국 러시아를 상대에게 싸운 것은, 나라의 운명이 걸려 있었기 때문에입니다.
    이 싸움에 지면 조선이나 일본도 러시아에 점령되고 있었지요.질 수는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이것이라도 여러분은 「일본은 최초부터 침략의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라고 생각합니까?
    한국에서는 그렇게 교육하고 있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사실은 다릅니다.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했을 때, 한반도에서도 큰 축하회가 열린 것은 알고 계십니까?
    이토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조차, 이 러일 전쟁 승리의 보에 소뛰고 기뻐했다고 말합니다.당시 , 청일 전쟁이나 러일 전쟁은 많은 조선의 사람들에게도 지지를 받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나라에서 가르치고 있는 내용과 다르겠지만, 교과서 이외의 역사적 문헌을 읽으셔 주세요.

    나는 일본의 군부가 대두해 온 1920년대 중반 이후, 특히 1940년대가 일본의 정치의 암흑 시대라고 생각합니다.그 당시 조선의 사람들에게도 큰 폐가 걸린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초부터 침략의 의도가 있었다」라고 할 생각은 잘못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오히려 처음은 서로의 관계는 훨씬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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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 Pacifist and lobbyists.

    The Japan Peace Treaty means nothing with regard to Liancourt Rocks.

    Even the letter written by Dulles shows the issue of Liancourt Rocks was not solved by the Japan Peace Treaty.

    The American's last official stance on the Liancourt Rocks was "Dispite U.S. views we support Japan's claim, we are just one of many signatory nations..." In other words the opinion of the U.S. government was just one of many other nations and the Americans did not have the authority to unilaterally make decisions regarding the disposition of former Japanese outlying islands.

    Dulles told the Japanese to refer article 22 of the Peace Treaty and go to ICJ. If they had a problem with territorial dispositions. In other words America admitted Japan did not regain sovereignty of Dokdo by virtue of the Japan Peace Treaty.

    America-Drops-Support-For-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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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 Pacifist and lobbyists.

    The Japan Peace Treaty means nothing with regard to Liancourt Rocks.

    Even the letter written by Dulles shows the issue of Liancourt Rocks was not solved by the Japan Peace Treaty.

    The American's last official stance on the Liancourt Rocks was "Dispite U.S. views we support Japan's claim, we are just one of many signatory nations..." In other words the opinion of the U.S. government was just one of many other nations and the Americans did not have the authority to unilaterally make decisions regarding the disposition of former Japanese outlying islands.

    Dulles told the Japanese to refer article 22 of the Peace Treaty and go to ICJ. If they had a problem with territorial dispositions. In other words America admitted Japan did not regain sovereignty of Dokdo by virtue of the Japan Peace Treaty.

    America-Drops-Support-For-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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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 Anonymous12/8/08 00:36

    Dear Pacifist,

    당신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습니다. 한국의 입장은 전혀 다른 것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런 역사의 시각을 처음 접하게 되어서, 다시 한번 역사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조선이 식민지가 된 것은, 조선 자신의 책임이 가장 큰 것은 인정합니다. 주변국이 선진화 될 때, 문명에 뒤쳐져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전쟁이나 침략, 살인 등은 어떠한 논리로도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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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 so....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만, 그런데 Liancourt Rocks(독도)의 이야기입니다.우리는 과학적으로 이 분쟁을 검증해 왔습니다.

    경찰의 과학적 수사와 같습니다.지문이나 모발 등 증거가 되는 것을 찾아 과학적으로 검토하고 진실을 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일본에는 에도시대(17 세기 이후) 어민이 Laincourt Rocks에 가고 있던 증거로 해 세밀한 지도가 있습니다.두 개의 바위의 섬으로부터 할 수 있던 형태에 그려져 있고, 게다가 오키 제도로부터의 거리, 울능도까지의 거리도 거의 정확하게 쓰여져 있습니다.이것은 일본인이 17 세기에 실제로 Liancourt Rocks에 건너고 있었다고 하는 확고한 증거입니다.이것은 인정하시는군요?

    한층 더 명칭을 둘러싼 혼란이 있었습니다만, 결국 일본은 1905년에 「다른 나라가 침입한 형적이 없다」로서 정식으로 일본령으로 해, 시마네현에 편입했습니다.

    여기서 실제로 그것까지 타국의 침입이 없었다면 일본의 주장은 국제법 위에서 인정됩니다.

    한국 정부가 말하는 것처럼 이전부터 한국이 지배하고 있었다고 하면 일본의 주장은 무너집니다.
    그 의미로, 한국측의 주장을 증명하는 증거가 있는지 않은 것인지, 그것이 이 문제의 키포인트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지만, 지금까지 과학적인 증거는 전혀 없습니다.
    한국 정부는 「Liancourt Rocks는 한국에서는 Usando로서 알려져 있어 낡은 문헌에도 나온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blog로 검증한 것처럼, Usando는 Liancourt Rocks가 아니었습니다.사람이 많이 살고 있었다고 하는 섬, 울능도의 겨드랑이에 둥글게 그려진 섬이 그 둘의 울퉁불퉁 한 바위의 섬과 같다고 생각됩니까?그것이 과학적인 증거가 되면 정말로 생각됩니까?최근에는 권고의 학자도 Usando는 Liancourt Rocks는 아니었다고 인정해 오고 있습니다.

    그러면 1900년의 칙령에 나와 있던 Seokdo(이시지마)가 Liancourt Rocks입니까?이것도 지금까지 봐 왔던 대로, 부정적입니다.

    정말로 Liancourt Rocks는 한국이 소유하고 있던 섬일까요?
    큰 문제를 잉 그리고 있는 것이 현상입니다.그런데 , 한국 정부는 일본의 항의에 (듣)묻는 귀를 가지지 않습니다.국제 재판소에 가는 일도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정이기 때문에, 확고한 증거를 나타냈으면 좋겠다고 재삼에 걸쳐 한국만s응에 부탁하고 있는 곳(중)입니다.

    ReplyDelete
  39. dear lord,

    역사에는 다른 견해가 있는 것을 인정해 받을 수 있던 것만으로도 기쁩니다.반복합니다만 일본은 한반도에서는 침략 행위, 학살은 가고 있지 않습니다.조선과는 전화를 섞지는 않습니다.평화적으로 2국이 함께 되었을 뿐이므로.

    1940년대에는 조선의 분들도 일본인으로서 전쟁에 참가한 것은 확실합니다만, 모두 싸운 것만으로 서로 서로 손상시킨 것 가 아니었습니다.
    나는 전쟁을 미화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당시는 그러한 시대였습니다.

    일본이 군비로 강요해 한일 병합을 했다든가, 전쟁하고 조선을 손상시켜 빼앗았다든가 잘못된 인식은 버려 주셨으면 합니다.
    당시의 한국의 진보파의 사람들에게는 민주화·근대화의 비장의 카드로서 병합이 있어, 이것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고 하는 사정이 있어, 한편 일본 측에는 반대 의견도 있었다고 하는 것은 알아 두어 받고 싶은 곳입니다.

    ReplyDelete
  40. Steve,

    Readers can judge by themselves whether the Treaty was saying Liancouirt Rocks belong to Japan or not, if they read all the movements in sequence.

    So I wanrn you again - don't propagate 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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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 Anonymous12/8/08 01:11

    Dear Pacifist,

    너무 멀리 가셨군요.

    저는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에 관한 시각에 대해 말씀드린 것 입니다.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에 대해서는 어떤 식으로도 동의할 수 없습니다.

    http://hanmaum.web-bi.net/zbxe/freeboard/494

    위의 link에 나오는 사진을 보면서, 한국인을 어떤 생각을 할 것 같습니까?

    한일 병합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현실과 진실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논리입니다.

    저런 일은 일본국민이 당했다고 한다면, 일부 선량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위로 받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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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 Anonymous12/8/08 03:38

    Dear lord,

    If you don't mind, could you please tell me where those photos come from and who took them? Who owns them? Are they printed on a photo album? Are they property of a certain institution?

    Please don't feel offended. I just would like to know how you came to obtain those evidence and make sure the validity of the source.

    ReplyDelete
  43. dear lord,

    사진의 상당수는 군부 대두 뒤의 것이고, 또 많게는 조선으로의 물건이 아닙니다.
    또, 일본군에 의하는 것 나오지 않는 사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4매째는 변발과 복장으로부터 중국인에 의한 만행같습니다.

    10매째는 난징대학살의 사진으로서 잘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만, 난징대학살의 사진은 당시의 장개석군의 대일 공작으로서 장미 뿌려진 것으로, 나중이 되어 8할는 난징에서의 물건은 아닌 것을 알고 있습니다.

    11매째의 사진도 중국인에 의하지만 같습니다.이러한 사진에서는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습니다.시체의 사진은 전쟁이라면 어디에서라도(일본내에서도) 찍을 수 있습니다.아무 의미도 없습니다.hanmoumy는 반일의 사람이므로, 반일 선전으로 사용하고 있겠지만, 이러한 선전 사진은 오해를 낳아 할지언정, 아무것도 팔 것은 없습니다.

    ReplyDelete
  44. Thank you Gerry.
    It looks like Jukdo or Ullengdo, but not Linocourt roc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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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 Anonymous12/8/08 09:33

    Dear Pacifist,

    당신은 너무 쉽게 말하는군요.

    위의 사진은 전쟁은 발생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일본의 우익은 선량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당신이 그것을 인식하고 있던 그렇지 않던, 이미 벌어진 사건입니다.

    나의 부모님도 일본 식민지 시대를 겪으신 분들이십니다. 당신의 일방적인 느낌으로, 실제 사건을 겪은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ReplyDelete
  46. Lord,

    That has nothing to do with Dokdo (Liancourt Rocks).

    ReplyDelete
  47. dear lord,

    전쟁이 비참한 일, 두 번 다시 가라면에 일은 일본인이라면 모두 생각하는 것입니다.그러나, 한국도 베트남 전쟁에 참가했군요?거기에 이승만 정권은 미국이 세웠는데도 관련되지 않고, 이승만 리인을 일방적으로 당기고, 들어 온 일본의 어민을 사살해, 많은 어선을 나포한 사실 어떻게 생각합니까?

    일본은 연합국에 점거된 상태로 응전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피해를 받은 것입니다.그처럼 해 한국은 독도를 점거하고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평화 조약의 뒤, 평화 헌법이 되어있어 명실공히 평화 국가가 되었으니까, 한국의 이러한 태도는 일본인에 한국은 「무서운 나라」, 「군사 국가」라고 하는 인상을 주었습니다.

    이것에 관해서 한국의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일까요?일본군의 폭동과 아무런 다르지 않는 폭동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까?

    ReplyDelete
  48. Anonymous12/8/08 11:18

    Dear Pacifist,

    한국이 베트남전에 참전해서 전쟁을 한 것은 잘못되었습니다. 슬픈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의 잘못을 지적하기 전에 독일처럼 먼저 반성해보시기 바랍니다.

    Pacifist, 당신들의 독도 전략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신문을 보니, 일본이 미국에게 독도에 폭격 연습을 할 수 있게 허락해 주었다가, 다시 취소하는 형식으로 역사적 증거를 만들어 놓았더군요.

    그 폭격 때에, 조업을 하던 한국인 300여명이 독도에서 숨진 것을 알고 있습니까?

    한국의 학술조사단이 독도에 갔을 때에도, 일본은 미국에게 독도 폭격 연습을 허락했습니다. 그 때에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당신들의 교묘한 전략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당신의 일방적인 주장을 들어 주고 있는 이유는 근거를 찾기 위해서 입니다. 당신을 지지해서가 아닙니다.

    ReplyDelete
  49. Anonymous12/8/08 11:42

    Dear Gerry,

    이 곳은 독도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야기가 역사 문제로 흘러가서 link를 한 것이구요.

    한국의 일본 식민지 기간에, 일본이 독도 자료를 조작했다거나, 한국을 완전하게 일본의 영토로 만드는 공작을 꾸몄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독도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역사 문제일 수도 있겠군요.

    당신은 하나의 사실에 대해서 단편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관계 속에서 상황을 파악해 보려는 노력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ReplyDelete
  50. Anonymous12/8/08 12:59

    안녕하세요.
    so... 입니다.


    글을 잘 읽어보았습니다.


    쓰신 글 가운데
    청일 전쟁, 러일 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에서 한국 사람들이 기뻐했다고 쓰여있는데,상당한 일반화의 오류라고 생각합니다. 그 전쟁의 승리로 인해 이제 일본의 속국으로 떨어지겠구나라고 걱정한 세력도 있었고 심지어 관심조차 없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무엇을 보고 마치 한반도 사람 전체의 의견이 그러했다는 듯이 주장하시는지요? 저 또한 그 출처를 정확히 알고 싶습니다.
    신문 기사라는 것은 지금도 그러하듯이 전체의 의견이 아닌 당시 주도세력의 의견이 쓰여질 뿐입니다. 실상 어려운 현실과 마딱드려야 하는 사람들은 무어라고 생각했을지... (저 또한 더 조사를 해볼 필요를 느꼈습니다.)

    다시 Dok-do 문제로 넘어가서,
    저는 한국에 살면서 한국 교육과 언론을 통해서 독도가 우리 땅인 증거를 각종 실록과 지도를 통해서 늘 인식해왔습니다. 특히 독도가 그려져있는 고(古)지도가 발견되었다는 기사는 자주 접해왔고요.
    그 지도들의 주소는 여기 link하겠습니다. http://imag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image&sm=tab_nmr&query=%B5%B6%B5%B5%20%C1%F6%B5%B5&site= 이곳에서 그간 본 적이 없는 지도들을 발견하시길 바랍니다
    http://blog.naver.com/mariert?Redirect=Log&logNo=130005594780
    여기의 기사도 봐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에도시대(1603~1867) 가운데 일본어민이 Liancourt Rocks에 대해 조사했다고 하는데 Liancourt Rocks라는 용어는 1849년 프랑스 포경선이 온 19세기 중반 이후에나 쓰였습니다. 그 일본의 증거에도 Liancourt Rocks라는 말로 기록되어있나요? 그렇다면 뻔한 왜곡이 되겠군요. 부탁건데 제게 가르쳐 주십시오.
    (덧붙여,다른 이야기이지만 자국 사람들이 무슨 용어로 부르건 궃이 강대국들이 지어준 명칭만이 공식적으로 맞다는 논리는 어디서 온겁니까?...조금 답답하군요.)


    자꾸 "과학적 증거"를 말씀하시는데,
    과거 역사적 자료에 "과학"이 어디있습니까? 기록이라는 것은 결국 승자의 기록이며 얼마든지 왜곡이 가능합니다. 한국도 일본도 지금까지 보고 있는 자료들이 우리가 전문적인 고고학자가 아닌 이상 제대로 알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이러한 중요한 영유권 분쟁에 대해서 국제법상 우리나라는 유리한 위치입니다. 점유시기 및 선포시기, 방법에 관하여
    -17세기 이후 조선과 막부사이의 공문서에는 울릉도와 독도에 금항하겠다는 서한이 있습니다. (이것은 당연히 에도시대 일본 어민의 진출이 불법이었음을 알려줍니다.)
    -1900년, 고종황제가 신문을 통해 독도가 한국땅임을 선포했고 이것은 일본보다 5년 앞섭니다.
    -1952년 샌프란시스코조약에서도 일본영토에 독도를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현재주의 입장에서 본다해도 독도는 우리 땅입니다. 즉, 독도는 한국의 실소유 기간이 50년이 넘었고 우리 국민이 살고 있으며 군대도 주둔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 정부가 국제 재판을 피하는 이유는 일단
    1.힘의 논리에 있습니다. 일본을 옹호하는 국가들은 과거 진실보다 현재 일본과의 이익을 생각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약소국으로서 슬픈 현실입니다.
    2. 재판이 시작되면 그간 50년의 실제 소유 기간이 사라지며 다시 1년째가 됩니다. 우리가 왜 불이익적인 일을 해야합니까?
    3. 현재 한국 정부의 입지상, 외교적 분쟁은 국내 지지율을 더욱 떨어트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자국 정부의 국내 안정책에도 해당된다고 보입니다.

    또한,
    한일합방 후 일본이 행한 식민지 정책을 살펴보자면 그들이 독도에 관한 기록을 없애거나 훼손했다고 보는 것도 무리한 예상이 아닙니다. 그간 일본이 빼앗아간 문화재가 얼마이며, 심지어 먼 5세기의 일도 조작(광개토대왕비문)하는 사람들이 가까운 조선시대 일을 조작하지 못하겠습니까?

    ..말이 지나쳤다면 사과드립니다.

    저 또한 저의 의견을 고칠 수 있는 "아주 과학적이고 정확한 증거"를 바랍니다.


    한국은 장마가 시작되어서 무척 무덥고 비가 내립니다. 그쪽은 어떤가요? 건강에 유의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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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 Cloud, this is a French artists rendering of what was happening in Mukden China in at the same time Japan annexed Liancourt Rocks. (Russo~Japanese War 1904~1905) From Le Petit Journal a French publication.

    Japanese-Aggression-Gerry-Pacifist-Shameful-Denial

    Of course the Russo-Japanese War had nothing to do with Japan's annexation of Dokdo... Right Pacifist and Ger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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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 so...

    과학적 증거라고 하는 것은, 경찰의 수사에서도 고고학에서도 소중합니다.추측만으로는 무실의 사람을 범인으로 해 버리거나 역사를 잘못해 해석해 버리는 것에 연결됩니다.

    섬의 예로 말하면, 확실히 옛날 거기에 이른 인간이 있었는지 어떠했는지는, 고문서에 그 섬의 특징을 전하는 문서가 있다든가, 섬의 정확한 지도가 있으면, 증명됩니다.그리고 일본에는 그 정확한 문서도 지도도 있습니다만, 한국에는 전혀 없습니다.
    일본이 한국의 증거를 소멸했던 것이라고 하는 설은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상상으로 물건을 말하는 것은 그만둡시다.

    당신은 이 블로그의 기사를 제대로 읽혀지고 있습니까?읽혀졌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치졸한 잘못하기 어렵게 있어씨 있습니다.

    Liancourt Rocks는 에도시대에는 「마츠시마」라고 불리고 있었습니다.에도시대에 조선과 분쟁이 있어, 조선과의 우호 관계를 생각해 에도 막부가 조선에 양보한 것은 「(당시의 이름으로) 타케시마(Takeshima)」즉 울능도 뿐입니다.이것은 일본에 제대로 한 문서가 남아 있어 이 블로그에서도 소개하고 있습니다.Liancourt Rocks(당시의 이름은 「마츠시마(Matsushima)」는 이것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런 기초적인 지식 없이 논의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이 블로그의 기사를 잘 읽혀지도록 부탁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전쟁에 관해서는 발언을 가까이 둡니다만, 당신의 생각은 한국의 교육 그 자체입니다.그것이 모두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실제로 전쟁에 이긴 것을 축하해 항진 하는 한국 여성의 사진이나 한일 병합 후의 축하를 하는 한국인의 사진도 있는 거에요.한국에서는 이러한 출판물이나 사진은 판매할 수 없으니까 한국의 여러분이 보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가, 정부에 의해서 정보가 조작되고 있는 것은 용서 s라고 두는 편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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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3. Anonymous12/8/08 14:17

    Dear Gerry Beavers,

    당신은 당신에게 제공된 모든 자료가 100%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료가 의도적으로 조작되었거나, 의도적으로 삭제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군요.

    당신에게 보이는 것만 믿는 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Gerry, 독도 문제에 있어서 사건의 진실과 당시 시대 상황 등을 고려해서 분석해 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한국을 좋아하고, 독도에 대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 싫다고 했습니다.

    한국인은 당신처럼 한국인이 당한 고통을 모르는 사람이 독도에 대하여 이상한 주장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상황이 정리되면, 한국을 떠나 일본으로 가시기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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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4. Steve,

    Such a drawing has nothing to do with this blog.

    The drawing only reveals that the painter didn't see the act himself and drew it on imagination, because the sword the soldier is using is not a Japanese sword but a Chinese sword.

    So stop propagating that kind of paropaganda here. Go 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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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5. lord,

    당신이 말하는 것은 Gerry에 대한 협박입니다.이러한 행위를 하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몹시 유감입니다.

    자신의 의견과 다른 의견의 사람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근저입니다.

    그리고 객관적으로 보고 진실이 어디에 있는지를 판별하려면 , 「과학적 증거」가 필요합니다.

    객관적으로 보고, 한국이 일본에서(보다) 이전에 Liancourt Rocks에 도달한 증거, Liancourt Rocks를 이용하거나 관리한 증거, 이것들은 한국측에는 일절 없습니다.

    증거가 없는, 근거가 없는데 일본의 섬을 점거해, 무력으로 일본인을 죽인 것이기 때문에, 말하면 일본의 영토를 침략한 것이 됩니다.
    이것은 중대한 국제 범죄입니다.그런데도, 점거하는에 충분한 근거도 나타내 보이지 못하고, 미국의 권유에 의한 국제사법재판소에도 가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세계를 납득시킬 수 없습니다.

    한국의 여러분이 이것을 중대한 사건이라고 받아 들여 성실에 대응되는 것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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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 Anonymous12/8/08 14:41

    Dear Pacifist,

    저는 당신이 전쟁의 참혹한 사진을 보고, 전쟁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변명을 하려고 했던 것에 몹시 실망했습니다.

    Gerry에 대하여 제 기분을 말한 것은 잘못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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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 Anonymous12/8/08 15:12

    Dear Gerry Beavers,

    한국은 일제 식민지 기간에는 외교권을 박탈당했습니다. 대외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한국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가지 못한 것이 가장 요인일 것 입니다.

    일본은 한국국민에게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왜곡하여 가르치려고 하였습니다.

    일제 시대에 한국에 관련된 자료를 집에 개인적으로 보관하는 일은, 자신의 목숨을 거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독도 자료를 어떻게 보관할 수 있었을까요?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과 마찬가지로, 문화와 역사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30여년의 식민지 기간 동안 많은 문서들이 일본에 의하여 사라져 버렸습니다.

    당신이 보는 것만을 믿고 있다면, 거짓 주장을 믿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거짓된 주장이 더 달콤해보일 때가 많으니까요.

    ReplyDelete
  58. lord,

    나는 나의 핸들·네임이 나타내 보이는 대로, 전쟁이 싫은 평화 주의자입니다.그러나, 옛 장개석군의 반일 선전의 사진을 논의의 대상으로 하는 것은 어리석게 생각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승만 정권이 일방적으로 이승만 리인을 그어 Liancourt Rocks를 무력으로 점거해, 일본의 어민을 죽인 것은 어떻게 생각인가, 대답을 받음 싶다고 생각합니다.이것은 일방적인 전쟁은 아닙니까?군사 국가이니까 용서되는 것입니까?한국은 지금은 민주국가가 동료로 한 것은 아니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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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9. I am always wondering why pacifist is whining like a baby. Don`t do this don`t do that. Hey pacifist. Everybody has the right to do anything he wants. Who are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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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 Anonymous12/8/08 21:12

    안녕하세요.
    so...입니다.

    글을 잘 읽어보았습니다.
    우선 일본의 기록에 관한 저의 오류는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더 공부하겠습니다.

    그러나,

    당신들은 blog의 이름을
    [Dokdo-or-Takeshima] 가 아니라
    [Dokdo is Takeshima. We're absolutey right.] 로 바꾸시길 바랍니다.

    이곳은
    독도인가 타케시마인가를 논하는 곳이 아니라 오로지 독도가 일본땅임을 주장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이승만의 일본 어민 살해를 비난하면서 몇 배가 넘는 일본의 식민지 조선 독립투사 살해는 묵인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이를 민주주의와 연결짓는 참으로 의아스런 논리를 펼치는 곳입니다.
    pacifist씨 당신이 쓴 글에서 일본이 "당시 군사정부여서 전쟁을 시작했다"라고 정당화식으로 말했으면서 한국은 군사정부여서 그러냐고 비판아닌 비난까지 하고 있군요. 당신의 평정심이 깨지는 순간인것인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군요.

    참으로 재3국민다운 생각을 하는 곳입니다.
    참으로 일본식 환상에 젖은 곳입니다.

    이러고싶지 않아도 독도문제에 국한시켜 생각할 수가 없는 문제지 말입니다...

    더이상 이 곳에서 다른 의견을 펼칠 이유가 없다는 것을, 다른 글을 읽을 필요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 글에 리플을 달지 않아도 좋으니,
    이 마지막 글만 남기고 퇴장하겠습니다.
    쇠 귀에 경읽고 갑니다 그려...
    (lord씨 건승하십시오..있을 필요도 없는 것 같은데.. 이제 전 좋은 말이 않나올 것 같아서 그만 갑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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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 Anonymous12/8/08 22:40

    Dear So...

    저도 이 사이트에 계속 와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거짓말을 알아내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는, 말을 계속 시켜보는 것이 있습니다. 결국 앞뒤가 맞지 않게 되는 시점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펼친 논리에 자신이 빠지게 되어 있죠.

    그 시점이 오면, 재미있을 것 같네요.

    ReplyDelete
  62. so...

    당신은 사람이 쓴 문장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군요.

    Liancourt Rocks의 논의를 하고 있는데 일본의 전쟁 시대의 선전 사진을 여러분이 꺼냈으므로, Liancourt Rocks를 한국이 무력으로 점거한 것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라고 (들)물었습니다.아무도 대답하지 않는 것은 왜입니까

    이승만 정권이 군사 국가였기 때문에 용서됩니까?(이)라고 (들)물었습니다.

    여러분은 타인의 비난만은 하는 버릇에, 스스로 일을의 반성하는 것은 절대 없는 사람들같네요.

    일본의 전쟁 시대의 만행을 비판한다면, 똑같이 이승만 정권의 만행도 비판해야 하겠지요.
    이승만 정권은 스스로의 무리한 주장이 통하지 않다고 보면, 무력으로 섬을 빼앗았습니다.미국이 위법이라고 통고해도 (듣)묻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독도는 한국령」이라고 하는 강력한 선전 교육을 실시해 왔습니다.한국의 사람들의 생각은 그 덕분으로 세계 표준으로부터 크게 동떨어져 버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번 더, Liancourt Rocks의 영유권에 관해서 「정말로 영유권이 있는 증거가 있는지 어떤지」문헌을 읽어 검토해 주세요.
    그리고 증거가 없는 것을 알 수 있으면, 제대로 그 비를 인정해 주세요.

    우리도 정말로 한국측에 영유권을 증명하는 증거가 있다면, 인정합니다.그러나, 지금까지 는 한국측에는 영유권을 증명하는 증거가 인탕도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그것은 인정해 주세요.아주 없으면, 부디 확고한 증거를 보여 주세요.

    ReplyDelete
  63. dear lord,

    나는 당신이 so...씨와 같이 논리를 모르는 인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그렇지만 지금까지 , 「한국에 증거는 가득 있다」라고는 말씀하시지만, 아직도 그 증거를 나타내 보여 주실 수 없는 것이 유감입니다.

    여기는 과학적인 냉정한 눈으로 진실을 추구하기 위한 장입니다.

    일본 정부는 1905년의 시점에서 어떤 나라의 형적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Liancourt Rocks를 정식으로 일본령으로서 시마네현에 편입했습니다.이것은 확고한 사실입니다.이 사실을 한국측이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그 전에 한국측이 지배하고 있었다고 하는 증거가 필요합니다.여기까지는 이해해 주실 수 있는군요?

    그러니까, 지금 볼은 한국측에 던질 수 있고 있습니다.한국측이 이것을 제대로 던져 돌려줄 수 있을지 어떨지 즉 제대로 한 증거를 낼 수 있는지 어떤지로, 이 논쟁에 결착이 붙게 됩니다.

    부디 확고한 증거를 찾아 보여 주세요.
    그리고, 그것을 할 수 없다면, 「증거가 없다」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해 주세요.잘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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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4. Anonymous12/8/08 23:16

    Dear Pacifist,

    일본이 이미 오래전부터 독도 문제를 준비했다는 것에 대하여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많이 놀랐으니까요.

    제가 당장 무언가를 할 수는 없군요. 이점은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독도에 대한 자료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밝힙니다.

    이 주제와 상관없는 이야기 이지만, 일본은 위안부에 대해서도 부정을 했습니다. 일본 군대가 주도적으로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비밀 문서를 한국에서 입수하여 뉴스에서 보도하였습니다. 일본군에서 관리관을 파견하여 운영하였다는 증거를 미국에서 조사하여 보관하던 것입니다.

    이처럼 당신들은 역사를 교묘히 속여왔습니다. 최근까지 위안부 문제를 창녀라고 비유했었던 사실을 부인하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독도문제에 있어서도 지금도 자료는 충분하지만, 당신들의 논리를 반박하고, 당신들이 말하는 확고한 증거라고 하는 것을 준비하는데에는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군요.

    이승만 정권에 의하여 사망한 일본인에 있다면,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당신들의 교묘한 속임수에 의해서 독도에서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한 300여명에 대해서도 사과하셨으면 합니다.

    이승만 정권에 대한 문제는 독도문제가 해결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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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5. dear lord,

    위안부 문제는 여기의 테마가 아닙니다만, 약간 그립니다.당신이 말씀하시는 뉴스가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코멘트는 할 수 없습니다만, 일의 발단은 있는 일본인 기자가 기사로 한 것이었습니다.
    제주도에서 억지로 군대에 끌려가는 여성을 보았다고 하는 천이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큰 문제가 되고 나서, 그 기자가 실은 꾸며내로 쓴 기사라고 고백했습니다.
    전쟁 당시는 매춘은 위법이 아니었습니다.다만, 법률로 정기적인 위생 관리가 의무지워지고 있었습니다.
    정기적인 검진은 군대가 관련되고 있습니다만, 매춘부를 알선한 것은 민간의 업자입니다.전쟁중의 이것들 매춘부는 8할는 일본인이었지만, 이상한 일로 일본인으로 자신있게 나서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한국에서는 자신있게 나서는 사람이 있었습니다만, 결국 자주(잘) 검증해 보면, 이야기의 사리가 맞지 않는 것이 많아, 끝까지 남은 사람도 어떠한 상황으로 데리고 가졌는지라고 하는 점으로 이야기가 2전재역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옛 기억이기 때문에 다소는 애매한 곳도 있겠지만, 그렇다 치더라도 강렬한 인상에 남았을 것이다 기억이 그렇게 대굴대굴 바뀌는 것입니까.

    군대에 매춘숙이 붙어 간 것은 사실입니다만, 군대 자신이 매춘을 하고 있던 것은 아닙니다.일본에서는 이 이야기는 아무도 온전히는 서로 빼앗지 않는 이야기입니다.모두 최초로 꾸며내의 기사를 쓴 기자의 책임입니다.

    그런데 Liancourt Rocks의 이야기로 돌아옵니다.독도가 한국령이라고 하는 것이 「명백하다」라고 하면서, 그 근거를 나타낼 수 없는 것은 모순되고 있습니다.명백하다고 하는 근거가 없는데 「명백하다」라고 하는 것은(말이 나빠서 미안합니다), 허세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한국에서는 1950년부터 강력하게 「독도는 한국령」이라고 교육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해 버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신다면, 부디 증거를 내 주세요.어디의 문헌에 써 있다, 라든지 어느 지도에 실려 있다, 라든지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세요.한국은 정말로 기원 500년대부터 Liancourt Rocks를 알고 있었는지요?한국 정부는 쭉 그렇게 주장해 왔습니다만, 지금, 이 주장은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한국의 학자들도 Usando가 Liancourt Rocks가 아니었다고 인정해 오고 있습니다.그러면 증거는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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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6. Anonymous13/8/08 00:21

    Dear Pacifist,

    강제로 끌려간 사람은 창녀가 아닙니다. 강제로 끌려간 사람들은 자신을 절대로 창녀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생각과 실제 피해자의 진실을 혼동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당신들은 독도 자료를 준비하는데 상당한 시간을 투자한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는 독도를 한국의 것이라고만 생각했지, 자료를 체계화시키는 데에는 소홀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모순이 아니라, 시간이 필요한 일입니다.

    당신들의 논리를 한국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증거를 대보시기 바랍니다. 한국에서는 당신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를 분석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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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7. dear lord,

    한국에서 일본의 주장이 인정받지 못한 것은 한국에 보도의 자유가 없기 때문입니다.일본에서는 좌익도 우익도 나카미치도 여러가지 의견이 출판되어 보도됩니다.

    그러니까 나이토 마사노리와 같은 북한 sympathizer가 쓴 책에서도 당당히 출판됩니다.자유롭게 출판할 수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출판물을 통해서 우리는 한국의 사람들이 어떤 주장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친일적인 책은 곧바로 출판 금지 취급이 되어, 사실상 일반 시민은 읽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인터넷의 보급으로 우리의 사이트를 시작해 많은 정보가 새기 쉬워졌습니다.한국의 일반 시민의 분들에게 조금씩은 전해져 가는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Linacourt Rocks의 문제에 관해서는 일본에서(보다) 한국 쪽이 큰 예산을 사용하고 있습니다.일본의 외무성은 한국과의 우호 관계를 존중해 지금까지 너무 크게 취급해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시마네현과 같은 지방의 행정 단위가 운동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앞의 정권 때에 이 문제를 돌아 다니며 한국내에서 반일 운동이 활발하게 된 것을 보고, 많은 일본의 국민은 이대로 입다물고 있어선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되어 왔습니다.

    그러니까 예산만을 보면 한국 분이 일본에서(보다) 쭉 힘을 쓰고 있습니다.그런데도 제대로 설득력이 있는 증거를 낼 수 없는 것은 역시, 문제는 아닐까요.

    매춘부의 문제를 덧붙입니다.지금 증언하고 있는 사람은 억지로 데리고 사라졌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만, 그것만으로는 군대가 직접 매춘을 강요한 증거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일본에서도 그렇습니다만, 궁핍한 마을의 가족에게 안에는 딸(아가씨)에게 비밀로 업자에게 딸(아가씨)를 파는 경우가 자주 있었기 때문에입니다.
    본인으로 해 보면, 갑자기 남자들이 와 억지로 데리고 가졌다고 하는 증언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만, 데려 간 것은 업자이며 군대는 아닐 것입니다.
    최초로 「군대가 와 데리고 가졌다」라고 하는 기사를 쓴 기자는 이야기를 들어 돌아도, 그러한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꾸며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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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8. Anonymous13/8/08 03:47

    pacifist,

    You quoted: "... Apparently that is all Korean short of a cable to Fuccio."

    You have any ideas on what this "Fuccio" means? Is this a name for a 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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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9. Anonymous13/8/08 07:11

    Dear Pacifist,

    당신의 말하는 언론의 자유와는 크게 상관이 없습니다. 더 설득력있는 분석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한국은 일본이 얼마나 많은 자금을 독도 문제에 쓰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해외 도서관 등에서 자료를 수집하고, 로비스트 활동을 지원하는데, 상당한 액수를 지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단지 독도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일반인입니다. 정부의 일이나 학회, 자료들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이제 배우고 있습니다. 제가 독도 문제를 주도적으로 한다거나, 독도 문제를 연구하는 어떠한 위치에도 없습니다. 이점을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당신의 활동 내용을 보면, 독도 전문가인 것 같습니다. 이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 같습니다.

    독도에 직접적으로 사용하는 예산은 아주 조금밖에 안됩니다. 한국인으로서 그 동안의 정부의 대응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위안부 문제에 있어서, 당신은 변론하느라 급급하군요. 그런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안아야 하는데, 당신은 거짓 변명을 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일본 정부의 거짓말을 잘 알고 있군요. 분명히 당신은 일반인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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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 dear lord,

    나도 일반인입니다.보통 시민입니다.단지 몇년전, 일본에 한국 붐이 일어났을 때에 한국에 흥미를 가져, 서울에 몇 번인가 나갔습니다.그런 때에 돌연(전 정권때입니다), 「독도는 우리의 것」이라고 외치는 한국의 사람들의 열광적인 데모의 뉴스를 텔레비전으로 보고 놀랐습니다.
    일본인은 이승만 리인 소동으로 타케시마(Liancourt Rocks)를 불법 점거된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 데모는 비정상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일본안으로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왜냐하면, 점거하고 있는 나라가 점거된 (분)편의 나라로 향해 반일 데모를 하고 있으니까.

    많은 일본인은 한국인은 이해할 수 없는, 온전히는 교제할 수 없다, 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나는 왜 이러한 데모가 일어났는지에 흥미를 안았습니다.

    조사해 보면, 한국내의 교육에 문제가 있으면 알았습니다.일본에서는 객관적 기술이 표준이므로, 분쟁이 있는 경우는 「일본은 이렇게 주장하고 있지만 상대의 나라는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라고 쓰여집니다만.한국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을 알았습니다.
    거기서 한국의 사람들에게 이 문제의 본질을 이해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나름입니다.
    그런 때에 우연히 Gerry의 사이트로 Gerry와 알게 되어, 그의 새로운 사이트를 돕게 되었다고 하는 경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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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1. Anonymous13/8/08 08:34

    Dear Pacifist,

    대부분의 한국인은 일본이 역사를 속이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독도 문제 뿐만 아니라, 위안부 문제에 있어서도 역사를 부정하고 속이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전쟁기간 중에 네델란드 여인이 일본군에 의하여 강제로 위안부가 되었다고, 2007년에 미국 의회에서 눈물을 흘리며 비인간적 성 노예 생활에 대하여 증언한 사실까지 부정하려고 하는군요.

    당신들의 역사 부정이 독도 문제에 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독도 문제에 있어서, 한국인 모두가 납득할 만한 증거를 가져오시기 바랍니다.

    당신들의 거짓 논리가 진화해 온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2.4km 떨어진 섬이라고 하거나, 독도가 을릉도에서 보이지도 않는다거나, 독도에 가보지도 못했을 거라는 당신의 억지 주장을 받아들이는 한국인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 가짜 논리가 통하지 않으니까 새로운 논리를 개발하고 있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당신들의 거짓 논리를 이제 그만두시기 바랍니다. 당신들의 도덕성을 먼저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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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2. Lord,

    해외에서 독도에 대한 한국의 거짓된 주장이 폭로되면 일본에 대한 다른 한국의 주장은 신빙성이 많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국인들이 독도에 대한 거짓된 주장을 계속할까 말까 하는 장단점에 대해서 좀 생각해 봐야 할 문제가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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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3. dear lord,

    당신은 논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그렇지 않은 것 같네요.

    좋습니까, 한번 더 정리합니다.
    에도시대의 이야기는 놓아두고, 이야기를 간결하게 하기 위해서 1905년부터 시작합시다.

    일본은 주위의 나라가 이 섬을 이용한 형적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일본령으로 했습니다.이것에는 제대로 문서가 남아 있고, 이 blog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확인해 주세요.

    그런데, 한국측은 이 1905년 전부터 Laincourt Rocks를 알고 있고, 관리하고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주장이 뒷받침해로서 한국 정부는 한국인에 옛부터 Usando로서 알려져 온 섬이 Liancourt Rocks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blog로 검증해 온 것처럼, Usando는 Liancourt Rocks가 아니었습니다.사람이 많이 살 수 있는 섬, 울능도의 가까이의 둥근 섬이 Liancourt Rocks가 아닌 것은 누구의 눈에도 분명합니다.
    한국의 학자들도 최근에는 Usando는 Liancourt Rocks는 아니었다고 마지못해 인정하게 되어 왔습니다.

    그러면 어디에 한국의 측의 근거가 있는 것입니까?
    원래 근거가 없는 이야기였습니다.일본인이라면 모두 알고 있습니다.이승만이 마음대로 라인을 그어 이 섬을 점령해 버리고, 나중에 되고 변명을 하고 있을 뿐(만큼)입니다.
    당신이 이 나의 이야기를 부정하고 싶으면, 냉정하게 객관적인 증거를 제시해 주세요.일본이 역사를 날조 하고 있는 등о근거가 없는 이야기는 하지 말아 주세요.지금 그대로는 역사를 날조 하고 있는 것은 이승만 이래의 한국 정부가 되는 거에요.

    당신이 「일본은 역사를 날조 하고 있다」라고 하는 것은 한국 정부의 선전 교육을 믿어 입 뛰어날 수 있고 탓이에요.사물을 객관적으로 과학적으로 보도록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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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4. Anonymous13/8/08 10:19

    Dear Gerry,

    나와는 정반대 입장이지만,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군요.

    일본은 서양에 신사의 나라, 스시의 나라로 알려져 있습니다.

    위안부 문제라던가, 군국주의의 문제는 철저히 부정하고 있죠.

    이미 100년전부터 영국에서 "일본 원숭이"(일본인에게는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듣고 부터, 이미지를 바꾸려고 엄청나게 많은 투자를 했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일본은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독도 문제 뿐만 아니라, 많은 부분의 역사를 왜곡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조선시대 이전의 역사도 왜곡했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Gerry, 당신의 일본에 의하여 만들어진 허구의 이미지를 믿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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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5. Anonymous13/8/08 10:21

    Dear Pacifist,

    당신이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군요.

    위안부 문제는 독도 문제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으니, 여기에서 계속 토론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부정하던 사실들이 밝혀지게 될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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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6. Lord,

    당신이 잘못 알고 있습니다. 100년 전에 서양에서는 일본이 아시아의 희망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서 한국이 일본에 병합됬을 때는 한국 사람 중에서도 좋아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앞으로 해외에서 독도에 대한 두 나라 주장 중에 어느 것은 더 신빙성 있는지 두고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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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7. dear lord,

    당신은 정말로 논리를 모르는 사람이군요.그런 사람은 아니라고 믿고 싶습니다만.

    나는 전쟁 시대의 매춘 행위는 부정하고 있지 않습니다.군이 관여했는지, 의 증거가 없다고 합니다.

    나의 주위에도 전쟁의 체험자가 여럿 있습니다.누구에게 (들)물어도 「있을 수 없다」이야기라고 말합니다.당시의 한국내는 일본의 일부였기 때문에, 범죄는 경찰이 단속하고 있었고 치안은 좋았기 때문에, 그러한 행위가 있으면 누군가가 보거나 (듣)묻거나 하고 있을 것입니다만, 아무도 군대가 여성을 데리고 가는 현장을 목격한 사람이 없습니다.

    최초로 현장을 보았다고 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쓴 신문기자는 나중이 되고, 날조였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소동은 이 신문 기사를 발단에 시작했습니다.한국이나 중국내의 반일 단체가 달려들었습니다.미국의 법안을 지지한 일본계 의원은 중화계 주민이나 한국계 주민으로부터 헌금을 받아 활동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만, 증거도 없는데 소란피우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우리에게는 일본이 역사를 날조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이 날조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긴 안목으로 보면 한국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마이너스가 되는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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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8. Anonymous13/8/08 10:55

    Gerry,

    한국에는 친일파가 아직도 있습니다. 한일병합을 좋아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인은 일본으로부터 독립운동하신 분들을 좋아하고 존경합니다.

    독도 문제에 있어서, 한국은 제대로 대처를 못했습니다. 이점은 잘못되었습니다.

    한국은, 일본이 조선시대 뿐만 아니라 고대의 역사까지 왜곡했다는 사실들을 많이 밝혀냈습니다. 영어로 번역이 되지 않은 것이 유감입니다. 한국 또한 역사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의 말대로, 미래의 역사를 지켜보게 될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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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9. Anonymous13/8/08 10:59

    Dear Pacifist,

    당신은 논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논점을 잘못잡고 있군요.

    어제 뉴스에서, 한국이 미국에 있는 비밀문서를 입수했다는 말을 했습니다.

    아직 구체적인 내용은 모르겠으나, 일본군이 개입했다는 증거라고 했습니다. 당신들이 부정하던, 군대가 개입한 증거라고 했습니다. 저도 뉴스에서 본 것이니, 자세한 이야기를 하기에는 힘들군요.

    한국은 일본의 논리가 거짓임을 증명하려 하고 있습니다. 논점을 제대로 파악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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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 dear lord,

    당신의 결점은 뉴스로 보도된 것을 맹신 해 버리는 것이군요.한국에서는 확실히 신문은 보수적, 텔레비전은 왼쪽에서(보다)였지요.

    「뉴스로 하고 있었지만 내용은 모른다」에서는 논리이고 뭐고 있던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독도 관계의 뉴스를 봐도 압니다만, 한국에서는 많은 허위의 뉴스가 흐릅니다.그것을 하나하나 자신의 머리로 생각해 검증해 나가는 것이 필요합니다.검증도 하지 않고 소란피우는 것은 턱없이 어리석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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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1. Anonymous13/8/08 11:17

    Dear Pacifist,

    뉴스로 보도된 내용중에 사실과 다른 내용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뉴스에서는 비밀문서의 자세한 내용까지는 보도하지 않습니다. 커다란 내용을 전달합니다. 당신도 그 문서를 구해서 보면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Pacifist, 당신에게 그 문서의 존재를 알린 것입니다. 논점을 제대로 봐 주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그 문서의 존재를 알렸으면, 그 문서를 구해서 반박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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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2. dear lord,

    일본에서는 그 뉴스는 보도되고 있지 않습니다.한국의 미디어는 반일에 결합되는 것에는 곧 달려들기 때문에, 정말로 그 뉴스가 가치가 있는 것 인지 어떨지, 내용을 검증하지 않으면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뉴스에 접한 당신이 제대로 검증하고, 신뢰할 수 있는 뉴스라고 생각되면 그 시점에서 말씀하셔 주세요.

    위안부 문제에서도 한국의 사람들은 날조 기사에 달려들어 문제를 크게 했습니다.한국의 사람들에게는(말이 나빠서 미안합니다) 제대로 검증하지 않고 감정적으로 되는 나쁜 버릇이 있습니다.
    냉정하게, 그리고 과학적인 눈으로 판단해, 대처해 주시는 것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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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3. Anonymous13/8/08 13:02

    Dear Pacifist,

    미국이 독도 문제를 원상 회복시켰을 때에, 일본의 뉴스나 신문에서는 크게 보도 하지 않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나라도 완전한 언론의 자유가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단지 정치인에게 유리한 기사가 많을 뿐입니다.

    당신은 부정하고 있지만, 계속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지 못하는 시점이 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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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4. dear lord,

    당신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이번 미국이 「원상회복」의 것은 섬의 이름뿐입니다.독도를 Liancourt Rocks로 변경시키면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율이 내려 미국에 있어서도 바람직하지 않기 위해(때문에), 원의 명칭에 되돌렸을 뿐입니다.섬의 영유권에 관해서는 미국은 중립을 지키면 일본의 관방장관에게 통지해 와있습니다.
    미국 발행의 지도에 실리는 이름이 독도가 될까 Liancourt Rocks가 될까의 차이만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한국에서는 큰소란이었지만, 일본에서는 큰소란이 되지 않았습니다.

    미국은 수많은 서류를 보면 아는 대로, 이승만의 Liancourt Rocks 점령을 비합법으로 간주하고 있었습니다.몇번이나 비밀리에 이승만에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동맹국의 일본이나 한국도 잃고 싶지 않기 때문에, 중립의 입장을 취해, 2국간에 해결해 주어라고 말합니다.
    미국으로 해 보면 한국과 대립하고 있는 틈에 북한이 공격해 와서는 곤란하므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겠지만, 우리로 해 보면 진실을 아는 미국이 한국에 더 강하게 강요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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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5. dear brownie,

    "Fissio" may have been "Muccio". Muccio is the name of the Ambassador to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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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6. Anonymous13/8/08 19:04

    Thanks pacifist. A close look seems to tell it's "Mucc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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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7. Anonymous13/8/08 19:04

    Thanks pacifist. A close look seems to tell it's "Mucc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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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8. dear brownie,

    Thanks, I amended the 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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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9. Gerry and everyone.
    Long time no see.

    You Gerry said :
    And you should cannot forget the September 16, 1948 letter from Korea's "Patriotic Old Men's Asssociation," which claimed that the name "Docksum" (Dokdo) came from the fact that the island was shaped like a Korean bowl.

    I say :
    In the page 2 of the original, it was written “… a small island called “Docksum” in Korean name, meaning a small pot-shaped island, near Ulleungdo. … “
    There was mainly 3 theories about the name of Dokdo(獨島, 독섬) as far as I know.
    1. 獨島 means ‘a lone island(孤島)’.
    2. 독섬(Dokseom) means a pot-shaped island. It will be written in Chinese as “甕島(옹도)”
    3. 독섬(Dokseom) means a rock island in a Korean regional dialect. It should have been written as “石島(석도)”.
    But, now it is written as 獨島. Why? Because theory 1 is correct? No! Clearly, the rock island was called as ‘Dokseom’. So, we can conclude that 石島(or 甕島) is the closer to the common ways of written expression rather than 獨島. But, at the official gazette 1900, it was written as 石島, and, in the report by the Uldo county governor, as 獨島. I don’t think the rocky island looks like a small pot, so I don’t support the No.2 theory. Gerry, you need to care about the fact that there were many theories about its names, even before the year 1952.

    And Gerry said :
    Moreover, the letter seemed to be saying that Takeshima, Liancourt Rocks, and Dokdo were all names for the island "Ulleungdo."
    『The so-called Takeshima is the very "Docksum (sic) in Korean name, "and this is namely, Liancourt Rocks on the world's chart. This name "Liancourt Rocks" was established due to the name of French whaler which found out the island. Thereafter, by the Russian Warship "Palleada" in 1854 and by the English warship "Hornet" in 1855, the said island was re-found and the ship's name was given to it. But it was never suspected that variously named island was the very island of "Ulleungdo."

    But I say :

    I will rewrite the above ‘passive voice’ sentence into an ‘active voice’ one.
    We never regarded the variously named island as the very island of “Ulleungdo”. = We never misunderstood the variously named island as the very island of “Ulleungdo”.
    I just want to give you the chance to think about its meaning.


    About Parangdo, you said :
    Parangdo did not exist, and ....

    I say :
    It exists. It was an islet showing up and submerging repeatedly before becoming an observatory. That islet was expressed in the petition letter p.5:
    “Parang” is a series of islands which are on the sea, Long 125°E and 32°30’ N.L. “Parang” is a Korean word and means “green island,” and it has been a markpoint of course from Mokpo to Hangju of China. The localization of the islands is measured by 150km from Cheju of Korea, 450km from Nagasaki of Japan and 340km from Shanghai of China, and their belongings are by these distances well explained. …
    Here is Naver encyclopedia.:
    http://100.naver.com/100.nhn?docid=771705
    위치는 북위 32.07˚, 동경 125.10˚이며, 한국 최남단 마라도 서남쪽 149㎞, 일본 나가사키현[長崎縣] 도리시마[鳥島]에서 서쪽으로 276㎞, 중국 퉁다오[童島]에서 북동쪽으로 245㎞지점에 있다.

    Though you are biting the word "a series of islands~~~", the location is roughly correct and the islet was(and is) 'r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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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 Hi MyCoree.

    The Patriotic Old Men's Asssociation did not know the islands they were claiming, but seemed to have just pulled the names out of some foreign books.

    For example, Parangdo was "not an island," but just a submerged rock 15 feet below the surface of the sea at low tide. The Korean association obviously did not know that since they assumed that Japan would occupy it. Moreover, in 1951, the Korean ambassador said Parangdo was in the vicinity of Ulleungdo, which tells us that he had no clue about "the island" he claimed was historically Korean. When Koreans finally realized that Parangdo was not an island, they dropped their claim on it.

    The Patriotic Old Men's Asssociation obviously did not know about Dokdo, either, since they said that the island got its name from the fact that it was "pot-shaped." They just assumed that the "Dok" in Dokdo was the Korean word for "pot," which tells us they did not have a clue about the shape of Ulleungdo or the orgin of its name.

    Also, you seem to be intentionally misinterpreting the following sentences:

    Thereafter, by the Russian Warship "Palleada" in 1854 and by the English warship "Hornet" in 1855, the said island was re-found and the ship's name was given to it. But it was never suspected that variously named island was the very island of "Ulleungdo."

    The sentences was saying that the English and Russians never suspected that the named island was "the very island of 'Ulleungdo,'" not the Koreans.

    In 1899, a Korean newspaper article described Ulleungdo as having six, small neighboring islands, of which Usando (Jukdo) was the most prominent. Korean maps of Ulleungdo since 1711 up until the 1900 edict consistantly showed Ulleundo with with six small neighboring islands, of which Usan was the most prominent. Even this THIS MAP of Gangwon Province from a 1901 Korean atlas showed Ulleungdo with six neighboring islands with Usan (于山) as the largest. 1901 was after the 1900 edict.

    The 1900 Korea edict named Jukdo and Seokdo as Ulleungdo's neighboring islands. Jukdo was the Usando on old Korean maps, which can be easily confirmed by comparing the locations. The Seokdo in the edict meant "rock islets," and was used as a catchall phrase to include all the other rock islets around Ulleungdo, including the five rock islets that had regularly appeared in old Korean maps and were referred to in old Korean documents.

    The theory that that "Seokdo" (石島 - Rock Island) somehow evolved into "Dokdo" (獨島 - Lonely Island) within just a few years is a desperate theory created to make up for the fact that Korea had no maps or documents to back up their claim on Dokdo. Even after the 1900 edict, Koreans on Japanese fishing boats were using the Japanese name for the islets. It was not until 1904 the the name Dokdo was even mentioned.

    Moreover, after the Ulleungdo County magistrate reported to his superiors about "Dokdo" in April 1906, Koreans still did not claim it as a neighboring island of Ulleungdo when Japan asked the Korean Interior Ministry to clarify Ulleungdo's neighboring islands in July 1906. Korean officials had been using the name "Dokdo" just months earlier, yet it was not mentioned as a neighboring island of Ulleungdo in July 1906.

    I think the Patriotic Old Men's Asssociation was just a bunch of old men, which included Choi Nam-seon, who simply searched through Japanese and Western geography books looking for islands that Korea could claim. That is why they were quoting foreign texts rather than Korean and why they did not have good descriptions of the isla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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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 Anonymous14/8/08 14:42

    Gerry,

    한국은 1945년까지 식민지가 되는 고통을 당했고, 1950년 6월 25일 부터 3년 동안 전쟁을 한국전쟁을 겪었습니다.

    "The Korean ambassador"가 한국을 대표로 외교를 하는 사람이 맞습니다.

    여기에서 과연, 이 사람이 식민지 지배를 당하는 동안 한국의 지리에 대하여 얼마나 공부한 사람이었을까 궁금해집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사람은 맞는데, 그런 시기에 한국의 지리 정보까지 대표를 할 수 있는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또한 전쟁 기간 중에 주고 받는 서한에 대해서, 어느 정도 정확하게 사건이 처리되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저는 최근에 독도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Gerry 당신이 나보다도 더 많이 알고 있는 것 같기에 질문을 합니다.

    저의 요점은, 한국의 대사가 지리 전문가 였는가와, 어려운 시기를 겪으면서 독도 문제에 대하여 잘 대처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p.s 한국의 대사가 무능하다는 것을 지적하려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시기였음을 지적하려는 글입니다.

    ReplyDelete
  92. Gerry.

    1.
    Parangdo is a group of some submerged rocks not an islet(小島), so I admit that it was an improper word I used. But, you should admit that you didn’t express it accurately. You should have said like this : Parangdo “existed” as a submerged rock. By the way, Parangdo seems to be a group of more than ‘a rock’ : Ieodo and Parangcho. http://www.ckjorc.org/ka/view.asp?id=283 At that time, it was worth claiming to prevent it from foreign occupation. After building observatory there, it is an islet now, not submerged rocks. I think so.

    2.
    About this :
    But it was never suspected that variously named island was the very island of "Ulleungdo."

    In the context, it’s very hard to think that the Association supposed Takeshima, Liancourt Rocks, and Dokdo were all names for the island "Ulleungdo."
    On behalf of it, there might be a mis-wording ‘Ulleungdo’ instead of ‘Doksum’.
    Or, there might be a missing word – for example, “the very Doksum beside Ulleungdo”. Whatever ! In this letter, they are saying that the wrong-informed were the foreigners, not Koreans.
    And, you cannot say that the the ‘1948 claim’ was wrong. You can only say that ‘1951 knowledge’ within the ambassador’s head was wrong.
    And, I am not ‘misinterpreting intentionally’. I’m just trying to solve the self-contradictory context.
    If you are right, read the next sentence. There is a data supporting their claim. In the 2nd edition of the “Korea hydrographies” published by the Japanese Navy Hydrographic Department 1889, the Liancourt-Rocks and Ulleungdo are described as a same island.. It’s a pity I don’t know what it was.

    3.
    Next, you said:
    1901 Korean atlas showed Ulleungdo with six neighboring islands with Usan (于山) as the largest. 1901 was after the 1900 edict…..
    Moreover, after the Ulleungdo County magistrate reported to his superiors about "Dokdo" in April 1906, Koreans still did not claim it as a neighboring island of Ulleungdo when Japan asked the Korean Interior Ministry to clarify Ulleungdo's neighboring islands in July 1906.

    I say :
    Why you are always looking Usan(于山) without viewing the whole six? Do you think Usan(于山) is located in the right position and the other five are fancy? No. the six islands including Usan were nothing but symbols.
    And, chronologically, one year is not sufficient for updating all the data including the relevant maps.
    And, at the same time, Doksum can be written as both 獨島 and 石島. There could be some forced political circumstances to do so, and 石島 was inclu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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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3. Gerry, 
    I guess,although these days Korea claims that Suyan rock/Ideodo be Parando, there are a possibility a underwater pinaacle nearby Uluengdo would be;
    1.双頂礁
    朝鮮沿岸水路誌 1933
    双頂礁 竹島の頂より4度 1.5浬に在り水深0.9米及1.3米Mにして荒天の際には波浪す。◎此の礁より孔岩をXむれば正に兄弟岩中の北西岩と鬱陵島の北東岸との中央に当たり其方位は257度なり。
    朝鮮南東岸水路誌 Aug.1952
    双頂礁 竹島の頂から4°約3Kmにある、水深0.9Mと1.3Mとの礁で、荒天の時には波浪する。この岩礁から孔岩をみると方位257°で、三兄弟岩の北西岩と鬱陵島の北東部との中央にあたっている。

    Or ,Paraando be Fang(Pang)Lin tao(do)?
    2.Fang-Lin-do>Pan lin do?(江陵島?欝陵島? on western map around 1730-184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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